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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건의 설교
2026년 6월 14일, 예담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자가 로마서 3장 9-20절을 본문으로 "냄새가 말한다 — 구원은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확인된다" 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로마서 3장 9-20절은 바울이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인용한 말씀들을 한데 모아 인간에 대한 총체적 고발장을 작성한 단락이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는 선언을 시작으로, 목구멍·혀·입술·입·발·눈 등 온몸이 죄의 자리임을 열거한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할 뿐,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이 말씀에 "아멘"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이 그 죄인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흔들릴 수 없는 복음의 진리이며, 구원의 확신은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어차피 구원받았으니 삶이 어떠하든 상관없다"는 자기 확정으로 굳어버릴 때 위험이 시작된다. 이는 소위 구원파적 신앙으로, 복음을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고 그 은혜를 방종의 구실로 바꾸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히 경고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 확신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나, 그것이 "이방인과는 다르다"는 교만으로 흘러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우월감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나는 구원받은 성도야"라는 고백이 삶의 변화 없이 특권 의식으로 굳어버린다면, 이는 바울이 9절에서 정면으로 논박하는 그 유대인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통해 핵심 주제를 전개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한 것은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가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말과 다름없는, 명예 살인도 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패륜이었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땅(유대인에게 단순한 재산 이상의 '기업')을 팔아 재산을 나눠주었고, 아들은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탕진한 뒤 돼지 우리에서 돼지 먹이로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와 고백을 다 듣기도 전에 끌어안고, 집에서 가장 좋은 옷(아버지 자신의 옷)을 입혀 아들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그러나 설교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옷을 입은 아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어땠을까? 돼지 우리에서 살던 사람의 냄새는 쉽사리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해도, 아들 자신은 그 냄새를 안다.
이 비유는 구원받은 성도의 현실을 정확히 묘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값은 완전히 치러졌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 안에는 죄성(罪性, indwelling sin)이 남아 있다. 죄책(죄에 대한 책임)은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지만, 죄에 대한 성향은 여전히 남아 우리가 지금도 죄를 짓는다. 바울 자신도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했다.
이를 라틴어로 Simul Iustus et Peccator(힘을 유스투스 에트 페카토르), 즉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이라 표현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정체성의 이중성이다. 교만·시기·정욕·탐심·분노의 냄새가 아직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냄새를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은혜다.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함부로 살 수 없다.
냄새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면서, 아버지 집의 향기가 조금씩 배어들면서 바뀐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은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에게나 망하는 사람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선언한다. 그 향기는 말로만 선포되지 않는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행동, 즉 어려운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밀 때 난다.
자신 안에 아직 돼지 우리의 냄새가 남아 있음을 아는 사람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이웃 앞에서 더 낮아진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선행을 낳아야 하며, 그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냄새이자 주님의 향기다. 어려운 이웃을 향해 내미는 손 중 최고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1절의 "그러나 이제는"이 복음의 전환점이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한 분을,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우리가 입은 가장 좋은 옷은 우리의 회개도, 눈물도, 섬김도, 경건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다. 구원의 확신은 내 삶의 성과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다.
설교는 세 가지 권면으로 마무리된다. 첫째,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냄새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알기에 더욱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것. 둘째, 겸손한 자리에서 날마다 주님 앞에 죄성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할 것. 셋째, 그 은혜에 빚진 자로서 어려운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밀 것. 주님 오시는 그날에 모든 죄의 냄새는 사라지고 완전한 의와 거룩함 가운데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설교를 마쳤다.
2026年6月7日,설교자가 예담교회 주일 예배에서 마태복음 11장 16-19절을 본문으로 설교를 전했다. 설교 제목은 "질문을 잘 하십니까?"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고 교회 안에서 실천하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다루었다. 목사는 6년 전 팬데믹 시기 이후 처음으로 이 교회를 재방문하며, 은퇴 후 설교자로 활동 중임을 밝혔다.
교회는 간판·목사·교단 등 외형적 제도를 갖추고 있으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모습과는 멀어진 경우가 많다. "리폼(Reform)"이란 원래의 형태(Form)로 다시(Re)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교회는 끊임없이 성경적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Institutionalized)되어 성경의 역동성과 멀어졌다는 점이 핵심 문제로 제시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창세기)대로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선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반면 인간이 만들어낸 신은 두려움에 기반한 신으로, 이는 내면의 죄성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두려움의 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관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독거노인에게 연탄을 날라주는 봉사 사례를 들어, 힘들고 고된 일임에도 "기분이 좋다"고 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임을 설명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고생스러운 선한 일에서 더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신앙생활의 구조는 세 단계로 요약된다.
"나름대로"는 세상의 언어이며,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주님 대로"임을 강조했다. 세상 가치관(비교·열등의식·유교적 체면)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전환되는 것은 마치 이민자가 새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과정과 같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라고 질문하시며, 당시 세대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임을 지적하셨다. 구체적 예로 두 인물이 제시된다.
이 본문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항상 조롱하고 거부해왔음을 보여주며,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은 오히려 상급임을 시사한다.
설교의 결론적 메시지는 두 가지 질문으로 집약된다.
교회는 잘난 척하는 곳이 아니라, 망가지고 넘어져도 서로 격려·축복·사랑하며 회복하는 연습의 장이다. "만두 빚기"는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흥분 없이 경청하고 칭찬하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전하는 실천 방식으로 소개되었다. 목장 공동체는 갈등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고 함께 머물며 연습하는 구조로, 이것이 진정한 신앙 성장의 통로임을 강조했다.
주님과의 관계의 깊이가 사람과의 관계에 그대로 반영되며, 이웃 사랑은 종교적 언어가 아닌 영적 감각의 표현이다. 교회 이름이 "예담(예수님 닮는다)"인 것처럼, 실제로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그 이름이 의미를 갖는다.
설교는 두 가지 질문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실천할 것을 권면하며 마무리되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묻고, 자신의 삶의 분위기를 점검하며, 세상 가치관 대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증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교회는 그러한 삶을 배우고 연습하는 공동체로서, "세상 안에(in it)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not of it)" 삶을 지향해야 한다.
2026년 5월 31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님이 출애굽기 17장 8-16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설교 제목은 "여호와 닛시 — 여호와가 대대로 싸우시리라"이며, 느비딤 광야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를 통해 영적 전쟁의 실체와 승리의 비결, 그리고 가정과 자녀 양육에 적용되는 신앙의 원리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전하였다.
"여호와 닛시"(나의 승리의 깃발)는 1990~2000년대 수많은 찬양팀 이름으로 쓰일 만큼 가슴 벅찬 선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출애굽기 17장의 배경은 화려한 찬양의 현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라 하나님을 원망하며 다투었던 느비딤 골짜기, 곧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한복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려나무 70그루와 샘 12개가 있는 최고의 휴양지 엘림에 잠시 머물게 하신 후, 기어코 메마르고 위험한 느비딤으로 이끄셨다. 이는 노예 생활만 했던 오합지졸 이스라엘에게 영적 영토 전쟁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1년 365일 중 대부분은 엘림이 아닌 느비딤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이끄신다.
출애굽기 17장 8절은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느비딤에서 싸우니라"로 시작한다. "그때"는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 온 백성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감격하며 찬양했던 바로 그 은혜의 순간이다. 사탄은 은혜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아말렉을 급파한다.
신명기 25장 18절은 아말렉의 전술을 폭로한다. 첫째, 피곤할 때 공격한다. 지치고 방전된 순간, 분노와 짜증이 폭발하는 틈을 노린다. 둘째, 행렬 뒤의 약한 자들을 공격한다. 병자·노인·어린아이 등 가장 취약한 곳을 무자비하게 물어뜯어 전체를 무너뜨리는 전략이다.
이 전쟁터는 특히 가정과 자녀 양육의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나타난다. 하루 종일 직장과 가사로 에너지가 바닥난 부모는 아이의 작은 실수에도 분노를 폭발시키고, 세상의 비교 의식이라는 무기로 자녀를 흔들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닌 세상의 노예로 키우도록 유도당한다. 결국 부모는 복음의 은혜 대신 욕심과 율법의 칼날로 자녀를 통제하게 되며, 실패 후에는 자책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인간적 결단과 노력으로 싸우려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것이 아말렉의 목표, 곧 가정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끊어내는 것이다.
승리의 비결은 인간의 기도 정성이나 노력이 아니라, 모세의 손에 들린 하나님의 지팡이에 있다(9절). 이 지팡이는 10가지 재앙, 홍해를 가름, 반석에서 생수를 터뜨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주권·신실한 언약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도구였다. 골짜기에서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무리 용맹하게 싸워도, 산 꼭대기에서 지팡이가 내려오면 지고 들려 있으면 이겼다. 이는 우리 인생의 전쟁이 인간적 유능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믿음의 손이 들려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80세 노인 모세는 혼자서 해가 질 때까지 손을 들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히고 양쪽에서 손을 붙들었다. NIV 성경은 이 상태를 "steady(견고한)"로, 히브리어로는 에무나(믿음·신실함)로 번역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보조가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으나 저 높이 들린 하나님의 지팡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믿음의 연대였다.
오늘날 부모들의 영적 비극은 영적 고립이다. 자녀 문제를 부부끼리만 해결하려 하고, 공동체에 나누기를 창피해한다. 그러나 예당교회라는 영적 가족 공동체가 함께 자녀를 양육하고, 지쳐 손이 내려오는 지체 곁에 돌을 내어주고 팔을 붙들어 주는 아론과 훌이 되어야 한다. 부부 간에도, 목장 식구들 간에도 이 믿음의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영적 게으름이다. 산 위에서 지팡이가 들려 있을 때, 골짜기에서는 여호수아와 군사들이 피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다. 부모도 마찬가지로 매일 자녀라는 믿음의 골짜기에서 실제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육체의 정욕과 분노를 제어하는 싸움(베드로전서 2:11)을 해야 한다. 분노의 감정으로 다그치는 대신 눈물로 훈육하고, 자존심을 꺾고 자녀에게 먼저 사과하는 일상의 칼을 휘둘러야 한다.
출애굽기 17장 16절의 핵심 선포는 다음과 같다.
"손이 여호와의 보좌를 향할 때 여호와께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 대대로."
이는 자녀의 통제권을 내 손에 쥐고 내 설계대로 끌고 가려는 통제의 고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항복의 손을 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내가 통제의 손을 쥐는 순간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부모는 불안으로, 자녀는 영적으로 죽어간다. 반대로 손을 펴 드릴 때 하나님은 "이 아이는 내 것이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친히 싸우기 시작하신다.
모세조차 혼자서는 손을 들 수 없었던 나약한 인간이었다. 우리에게는 결코 지치거나 손을 내리지 않는 진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주님은 갈보리 언덕 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끝까지 손을 내리지 않으셨고, 홀로 버림받으신 채 "다 이루었도다"라고 선포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무장해제하셨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와 우리 자녀를 위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중보의 손을 들고 계신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17:16)는 약속은 일회성이 아니다. 오늘 부모가 어떻게 아말렉과 싸우느냐에 따라 자녀와 손자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영적 유산이 결정된다. 내 힘으로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종교적 노력을 내려놓고,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 통제의 고삐를 내려놓고 보좌를 향해 항복의 손을 드는 그 믿음의 행위 위에, 하나님은 오늘의 아말렉뿐 아니라 자녀가 미래에 걸어갈 광야의 아말렉과도 대신 싸워주시겠다고 맹세하신다.
본 문서는 2026년 5월 30일 예당교회에서 진행된 설교자님의 유아세례 및 신앙 양육 교육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강의는 총 3회 차로 구성되며, 이번 1·2회 차에서는 유아세례의 신학적 의미와 부모 교육의 핵심 원칙을, 3회 차에서는 입교문답 교육을 다루었다. 소규모 인원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함께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강의 중 자녀들이 동석하는 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다음 세대"라는 표현은 성경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부모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언약의 자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언약(Covenant)과 약속의 차이: 약속은 언제든지 변경이 가능하고 책임의 무게가 가볍지만, 언약은 지키지 않으면 사망의 형벌이 따르고 잘 지키면 풍성한 복이 주어지는 무거운 상호 관계이다. 성경에서 첫 번째 언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행위 언약이며, 이를 어긴 결과로 사망의 형벌이 주어졌다.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 천하 만민이 받을 복을 약속하셨으며, 그 핵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더 친밀하게 표현하면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된다"이며,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이 개념과 직결된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며, 우리 자녀들도 동일한 축복과 영화로움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 따라서 앞으로 자녀를 부를 때 "언약의 자녀"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갓 태어난 아이도 원죄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아담의 죄로 인해 물려받은 성품의 전적 부패를 의미한다. 원죄로부터 파생하는 것이 자범죄이므로, 원죄가 없으면 자범죄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범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아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며, 유일한 구원의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유아세례는 단순한 축하 행사나 세리머니가 아니라 영적 생명의 선언이다. 이 아이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존재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순간이다. 구원은 진흙 구렁텅이 밖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이며, 이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이다.
구약에서 언약의 표시는 할례였고, 신약에서는 세례로 이어진다. 침례교 등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둘을 불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개혁파 신앙의 전통은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연속된다고 이해한다. 할례는 "표(sign)와 인(seal)"으로서, 하나님께서 "넌 내 것이다"라는 표시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세례도 동일하게 삼위 하나님의 보증으로서,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각각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를 이 아이에게 인장하는 행위이다.
유아세례 시기는 아이가 처음 교회에 방문할 때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주는 것이 가장 좋으며, 구약의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원리와 동일하다. 세례 방식에 있어서는 물을 충분히 붓는 것이 의미상 더 적절하며, 동방정교회의 방식처럼 아이의 얼굴에 충분히 물을 붓는 것이 죄에 대해 죽고 살아남을 상징하는 데 더 부합한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유아세례 교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교인 수를 셀 때 어른만 포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유아세례 교인까지 포함하여 교인 수를 산정해야 한다. 유아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는 온입교인에 해당하며, 유아세례는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울타리 아래 아이를 보호하는 의미를 갖는다.
유아세례는 또한 부모 파송식의 의미를 지닌다. 첫 아이가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부모는 본격적인 영적 지도자로 파송되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는 세례를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지적장애인에게도 세례를 줄 수 있다는 논리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구원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은혜의 필수적 선언을 늦출 필요가 없다. 신약 성경에서 루디아의 집, 빌립보 간수의 집 등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은 사례가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가 된다.
유아세례는 시작이며, 그 효력은 입교 순간에 빛을 발한다. 유아세례 교인이 자기 입으로 하나님을 시인하기 전까지, 교회와 부모에게는 그 아이를 신앙으로 양육할 책임이 주어진다. 이것이 주일학교 교육의 본래 목적이며, 통합신앙법에도 이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입교의 핵심은 성찬 참여이다. 유아세례 교인과 세례 교인의 차이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며, 주일학교 교육 전체는 아이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다. 입교는 만 14세에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 나이에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기간이 충분히 필요하면 더 기다릴 수 있다.
소요리문답 제1문답에 따라 자녀 양육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며, 가장 안정되고 평안한 삶이다. 부모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교육이 아니라, 완전한 지혜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① 성경 이야기: 구속사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한다. 어린이 성경 등 다양한 버전의 책을 활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지속적으로 들려준다. 유대인들이 신명기의 말씀을 미간에 새기고 문설주에 새겨 반복한 것처럼, 이해 여부와 관계없이 반복해서 쏟아붓는 것이 중요하다.
② 요리문답: 성경 이야기만으로는 신앙의 뼈대가 세워지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통해 교리 교육을 해야 하며, 반복과 암송이 핵심이다. 요리문답은 성경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해 주는 뼈대 역할을 한다. 아이들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교재는 올해 말에, 소요리문답 교재는 7월에 출간 예정이다.
③ 교회 역사: 2,000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부모의 경험은 한 시대에 한정되지만, 교회 역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폭넓게 보여주며 자녀도 그 과정에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준다.
④ 기도 훈련: 기도는 아이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기도함으로써 훈련된다. 아침, 점심, 저녁, 잠자기 전, 식사 시간 등 하루 다섯 번 이상 기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식사 기도 시 할머니·할아버지와 교우들을 포함하는 습관을 들이면 언약 공동체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 주기도문을 통한 기도 훈련도 중요하며, 이를 위한 교재도 집필하였다.
⑤ 생활 훈련: 생활 훈련이 잘 안 되는 주된 이유는 부모 자신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사 훈련의 네 가지 원칙은 감사하며, 주는 대로, 남김없이, 나누며 먹는 것이다. 이는 예절 교육이 아니라 권위를 배우는 훈련이다. 부모의 권위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이며, 아이들은 이 훈련을 통해 공급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정 예배는 반드시 해야 한다. 짧더라도 매일, 매주 드리는 것이 중요하며, 어릴 때부터 지속하면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습관이 된다. 예배하지 않는 자가 주일 예배에서 바른 태도를 가질 수 없으며, 매일의 예배 훈련이 주일 예배의 태도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징계를 명하고 있으며, 징계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아이가 깨닫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적 폭발이나 비난, 제3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의 징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징계 후에는 반드시 기도하고 복음으로 연결해 주어야 한다. 즉,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셨음을 가르쳐야 한다.
유아세례는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는데, 이는 아이가 교회 전체의 식구이기 때문이다. 양육의 일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지만,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보호하는 공동 육아의 개념이 중요하다. 교회의 연장자와 성도들이 일관된 신앙의 가치관으로 아이를 함께 돌보는 것이 영적 울타리 역할을 한다.
부모는 완벽할 수 없으며, 이미 실패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녀를 완전하게 만드신다. 폴 트립의 『완벽한 부모는 없다』를 강력히 추천하며, 자녀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서 나에게 맡겨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가 아둥바둥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기쁨과 소망으로 양육해야 한다.
전통적인 입교교육은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하는 것과 유아세례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은 다르다. 이번 입교문답 교재는 언약적 관점에서 새롭게 집필하였으며, 부모가 어떻게 양육했는지와 언약의 의미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입교문답 교육은 창조 → 타락 → 구속 → 회복의 네 단계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토론 중심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각 과는 마음 열기 → 말씀 공부 → 질문과 나눔 → 핵심 정리 → 삶의 고백 순서로 이루어진다.
현대 사회는 상대주의, 성공주의, 무한 경쟁의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로 인해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에 맞서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내 존립 자체이며,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세상의 종교는 내가 신을 달래야 하지만, 기독교는 반대로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이다. 구원은 내 안에서 깨닫고 수련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33문에서 칭의는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각 과에서 "세상이 말하기를"과 "성경이 말하기를"을 대비하여 제시한다. 예를 들어 구원에 대해 세상은 "더 많이 깨닫고 수련하여 얻는 것"이라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각 과의 마지막에는 "그래서 나는"으로 시작하는 삶의 고백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청소년기는 죄에 대한 민감성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이며,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 시기에 자기만의 공간을 지나치게 허용하면 죄가 짝꿍이 되어 토끼굴로 들어가게 된다. 공부는 오픈된 장소에서 할 수 있도록 하고, 쉐어와 오픈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생각이 모두 내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심어주는 생각도 있으므로, 부모가 분별해 줄 수 있도록 대화의 창구를 열어두어야 한다.
성경에는 사춘기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이른바 사춘기는 부패한 인간이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는 시기로 공식 인정받으려는 것이며, 이를 인정해 주는 것은 아이의 죄성을 방치하는 것이다. 사춘기를 인정하지 않고 일관된 훈련을 유지해야 하며, 이 시기에 아이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 교회 공동체가 영적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입교문답 교육의 최종 관문은 성찬 참여이다. 성찬은 새 언약 백성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그리스도와 언약을 갱신하고 기념하는 가족 식사이며, 구약의 유월절 식사와 연결된다. 믿음으로 떡과 잔을 받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하고 그분의 생명을 영적으로 공급받는다. 입교식 날에는 반드시 성찬을 함께 거행하여 아이가 공부한 내용의 의미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입교문답 교재 11과에는 나만의 신앙 고백 서약문 작성이 포함되어 있다. 서약문의 핵심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② 나는 본래 어떤 존재였는가, ③ 예수님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④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신앙의 사이클을 이루며, 아이가 자신의 언어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세속화된 사회의 핵심 가치는 혁신·기능·효용이며, 이 가치관 안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은 도태된다. 공교육 12년을 통해 아이들이 배우는 핵심 가치는 경쟁이며, 친구도 경쟁 대상이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신앙생활도 잘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이에게 자아 분열을 일으키는 이율배반적 요구이다.
부모가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으면서 신앙 교육을 하려 하면 아이들은 금방 알아챈다. 가정·교회·사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태도가 일치해야 하며, 그 일치된 모습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교육이 된다. 절제, 감사, 자족의 훈련은 예절 교육이 아니라 성경적 훈련이며,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근육을 키워준다.
설교자님은 유아세례를 1일짜리 이벤트가 아닌 14년 이상의 마라톤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부모는 완벽할 수 없으며, 실패로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지만, 그 실패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녀를 완성시키신다는 확신 가운데 기쁨과 소망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다음 단계로 권장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2026년 5월 24일, 예담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자(패밀리 교회 설교자, 북미 가정교회 전체 이사, 아프리카·중앙아시아·오세아니아 선교 강사)가 에베소서 5장 21-25절을 본문으로 "에덴의 기쁨, 교회의 영광"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설교자는 소박한 예배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에 깊은 감동을 표하며, 건물이 교회의 본질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유럽의 웅장한 성당들이 현재 관광지로 전락한 사례를 들어, 건물 중심의 신앙이 결국 교회를 공동화시킨다고 지적하였다. 반면 예담교회처럼 소박한 공간에서도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야말로 예수님이 꿈꾸셨던 교회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다고 격려하였다.
창세기 2장 8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에덴 동산을 미리 선물로 준비하셨음을 설명하였다. 에덴의 뜻은 "기쁨·환희·즐거움"으로, 하나님이 처음 설계하신 가정은 낙원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낙원이 깨졌고, 현실에서는 10가정 중 5가정이 이혼하며, 남은 5가정 중에서도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은 1가정에 불과하다는 통계적 현실을 제시하였다. 목사는 30대부터 가정 사역과 상담을 통해 크리스천 가정조차 행복하지 못한 현실을 목격하며 신학을 공부하게 된 개인적 여정을 나누었다.
에베소서 3장 9-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감추어 두신 비밀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언급한 것은 가정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임을 명확히 하였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모두 독신이었던 것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집중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설교자는 자신의 세 자녀(설교자 겸 목자, 둘째 딸 목자, 셋째 목자)가 모두 목장 사역자로 성장한 것을 간증하며,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하는 삶이 결국 가정의 행복으로 이어짐을 증언하였다. 46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아내와의 관계가 성경적 사랑과 순종의 원리 위에 세워졌기에 행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청중에게 다음을 권면하며 설교를 마쳤다:
2026년 5월 17일 주일예배에서 이강욱 선교사가 시편 112편 1~10절을 본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설교는 어린 시절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두려움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경외(야레, יָרֵא)의 의미와 그 삶의 열매 네 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설교자는 모태신앙으로 자라며 하나님을 "사랑"으로 배웠으나, 동시에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는 말과 엄격한 육신의 아버지 이미지가 겹쳐 하나님을 막연히 두려운 존재로 인식했다고 고백했다. 이 두 가지 원인—지옥에 대한 공포, 그리고 무서운 아버지의 상(像)이 하나님께 투영된 것—이 어린 시절 경외심의 실체였다고 분석했다. 또한 무속 신앙의 근간도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 존재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욕심"임을 지적하며, 이는 성경적 경외와 본질적으로 다름을 강조했다.
시편 112편 1절의 히브리어 야레(יָרֵא)는 "두려워하다"와 "경외하다" 두 뜻을 함께 지닌다. 구약 시편에서만 이 단어가 44회 반복되며, 그 목적어는 예외 없이 여호와·주·하나님·그의 이름·그의 영광으로 한정된다. 설교자는 6~9절을 근거로 경외하는 자의 삶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네 가지 특징을 정리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뜻과 생각을 모두 감찰하신다.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에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가장 정직한 인물로 다윗이 제시되는데, 열왕기상 15장 5절은 "우리아와 밧세바 사건을 제외하고는 평생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평가한다.
마태복음 18장 32~33절의 일만 달란트 비유에서 왕이 종에게 "내가 네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듯, 경외하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푼다.
전쟁, 기후 위기(엘니뇨), 급격한 사회 변화 등 불안한 소식이 끊이지 않는 2026년 현실을 언급하며, 심지어 런던 한인 교회 공동체가 삼성전자 주가 색깔에 따라 분위기가 좌우된다는 사례를 들었다. 그러나 시편 61편 6절과 에베소서 3장 17절처럼, 경외하는 자는 영원한 반석이시며 견고한 터가 되시는 여호와께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9절의 히브리어 파자르(פָּזַר)는 "낭비하듯 써버린다"는 뜻으로, 단순한 구제를 넘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삶을 가리킨다. 최고의 예로 사도행전의 바나바(본명 요셉)가 제시된다. 그는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내놓았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아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설교자는 설교자(100주년기념교회)의 1997년 괌 대한항공 추락 사고 간증을 소개했다. 설교자는 원래 조카를 통해 대한항공 편을 예약하려 했으나 만석으로 아시아나항공을 탑승했고, 그 대한항공 편(탑승자 254명 중 228명 사망)이 착륙 직전 추락했다. 사고 소식을 뒤늦게 전해 설교자는 "망망대해에 홀로 떨구어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이전에는 두려움과 사랑을 분리하여 설교했으나, 이 사건을 통해 절대 순종·절대 사랑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요한일서 4장 16·18~19절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그 사랑의 존재 앞에 머물다 보면 두려움이 사랑으로 대체되어 말씀을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즐거워하며 순종하게 된다. 시편 1편 1~2절의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가 바로 경외하는 자의 모습이다.
설교자는 믿음의 척도가 교회 직분이나 신앙 연수가 아니라, 경외로부터 비롯된 네 가지 삶의 열매—정직, 은혜를 베풂, 흔들리지 않는 평안, 가난한 자를 위한 플렉스—가 실제 삶에 나타나는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도전했듯, 청중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며 설교를 마쳤다: 두려움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그 두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매료되어 말씀을 즐거워하고 다윗이 맛보았던 "송이꿀보다 단" 경외의 삶으로 나아가라.
2026년 5월 10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는 로마서 3장 1-8절을 본문으로 "맡겨진 특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회중과 교독으로 본문을 함께 읽은 후, 신자의 특권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중심 질문으로 삼아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달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하고, 외적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뒤, 3장 1절에서 자연스럽게 묻는다: "유대인의 장점은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오늘날 "신자의 장점은 무엇인가? 세례의 유익은 무엇인가?"로 치환된다.
바울의 답은 명확하다. 유대인의 핵심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실패는 말씀의 청지기로 살지 않고 말씀의 주인처럼 행동한 데 있다. 말씀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통로로 삼지 않고 종교적 우월감의 도구로 사용했다.
김 목사는 이 위험이 오늘 교회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성경 지식, 예배, 찬양, 직분, 신앙의 연수가 어느 순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통로가 아니라 자기 의(義)가 될 수 있다. 전도 사역에서 영접 인원을 카운팅하다가 그것이 자신의 자랑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카운팅을 중단한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며, 오래 교회를 다닌 것보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3-4절의 선언—"사람은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은 로마서 전체에서 핵심적인 신학적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여기서 신실하심은 단순한 성실함이 아니라 언약을 끝까지 지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을 의미한다.
김 목사는 신앙생활에서 흔히 빠지는 두 가지 오류를 지적했다. 첫째,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낮추어 "내가 이만큼 하면 하나님도 이만큼 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둘째, 반대로 하나님이 너무 높고 위대하셔서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기는 것. 두 오류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오해한 결과다.
개인적 간증으로, 올 초 단맛과 짠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각 소실이 생겨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낙심했던 경험을 나눴다. 설교자와의 대화에서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 구원의 기반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임을 강조했다. 아담 이후 하나님은 언약을 반복적으로 맺으시고, 인간이 파기해도 끝까지 그 언약을 지키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힘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는 손이 더 중요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마음은 아들을 십자가에 달 정도로 비교할 수 없이 크다.
5-8절에서 바울은 "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난다면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는가?"라는 논리를 강하게 반박한다. 김 목사는 이를 구원파의 왜곡된 복음과 연결하며,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는 논리는 복음의 곡해라고 단호히 말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만인구원설도 오류임을 지적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하신다.
십자가는 죄가 가벼워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죄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이 죄를 대충 넘기셨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심판하셨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쏟아질 진노를 오롯이 십자가 위에 부으셨다. 진짜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죄를 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회개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이유 중 하나로, 회개하면 된다는 논리로 상대방에 대한 합당한 사과와 보상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꼽았다. 35년 운전 중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낸 경험을 나누며, 목사 명함을 건넨 상황에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일화를 통해 신자는 더 높은 기준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설교자는 설교를 세 가지 질문으로 마무리하며 자기 점검을 촉구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실하시며, 그 신실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부르고, 다시 일으키며, 끝까지 붙드신다. 설교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삶을 권면하며 합심 기도로 마무리되었다.
2026년 5월 3일 주일예배에서 설교자는 로마서 2장 17절부터 29절을 본문으로 "율법에 담긴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 설교는 율법(성경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오해를 바로잡고, 외적 형식보다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자유를 빼앗는 규제나 무거운 짐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김 목사는 로마서 2장 20절을 근거로 율법을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정의했다. 율법은 단순한 금지 명령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글자로 요약되어 우리 손에 쥐어진 사랑의 선물이다.
율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러브레터"다. 부모가 횡단보도에서 아이에게 신호등 규칙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 억압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보호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근본 이유도 사랑이다. 율법은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가지 않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인도하는 사랑의 이정표다.
첫째,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율법이 없다면 자신이 죄인인지조차 알 수 없다. 사회적으로 선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해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율법은 거울과 같다. 거울이 있어야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 수 있듯, 율법이라는 거울이 있어야 영혼의 추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다. 로마 시대에 귀족 가정이 자녀에게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개인 교사를 붙여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죽이려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다.
바울은 율법을 소유했으나 삶으로 실천하지 않은 유대인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김 목사는 본문의 핵심 단어를 현대적으로 치환하여 적용했다: 유대 사람 → 신자(교회 다니는 사람), 율법 → 성경 말씀, 할례 → 세례.
이 치환으로 읽으면, 성경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오늘날 신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24절의 결론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교회 다닌다는 당신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웃고 욕하는구나." 실제로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불교·천주교(약 22%)에 비해 현저히 낮으며, 교도소 내 신자 비율이 사회 전체 비율보다 높다는 사실은 이 위선의 현실을 반영한다.
바울은 25절부터 29절에서 할례(세례)의 참된 의미를 설명한다. 세례를 받았다고 자동으로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며, 세례를 받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핵심은 29절이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자가 유대 사람이요, 성령의 마음으로 받는 할례가 참 할례다."
마음의 세례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성령님은 굳어버린 종교적 껍질을 깨뜨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말씀이 삶에 실제적인 능력이 되게 하신다.
김 목사는 설교를 마무리하며 세 가지 자기 점검 질문을 제시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려고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진리와 지식의 아름다운 형상을 우리 삶에 새겨주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다. 참된 신자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라는 외적 조건 뒤에 숨지 않고, 말씀을 소유한 자가 아닌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 문서는 2026년 4월 26일 주일 예배에서 설교자님이 전한 설교를 요약한 것이다. 설교 본문은 창세기 43장 16~34절로, 제목은 "형제들을 시험하는 요셉"이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애굽에 팔렸으나, 꿈 해석을 통해 바로의 총리가 되어 7년 풍년을 관리하며 7년 흉년에 대비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흉년으로 인해 두 차례 애굽에 곡식을 사러 내려왔다. 첫 번째 방문 시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며 동생 베냐민을 데려올 것을 요구하였고,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여 베냐민을 담보로 두 번째 방문이 이루어졌다. 오늘 본문은 이 두 번째 방문 장면이다.
요셉은 베냐민이 형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청지기에게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하고 짐승을 잡아 정오에 함께 먹을 준비를 하라"고 명하였다. 이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요셉의 집이라는 특별한 환경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이 초대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공공장소에서 거래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최상의 대접이자 의도된 환경 조성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애굽이라는 세속적 공간에서 분리시켜, 자신이 설계한 새로운 질서의 공간으로 이끌었다.
형들은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자 크게 두려워하였다. 첫 번째 방문 때 자루에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던 일이 발각될까 염려하며, "우리를 억류하고 노예로 삼으려 한다"고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청지기는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다"고 말하였다. 설교자는 이 표현에 주목하였다.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언약 공식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적 관계—를 전제한다.
이 표현을 청지기가 사용했다는 것은 요셉이 애굽에서도 언약의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단초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이면서 그 공간 안에 언약의 하나님을 소환함으로써, 두려움의 환경을 은혜의 환경으로 전환시켰다.
설교자는 이를 신약적으로 적용하였다. 오늘날 성도들이 가진 두려움—돈, 미래, 건강, 생명—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복음의 은혜, 곧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은혜가 성도의 정체성이며, 이것이 세상의 모임과 교회 공동체를 구별하는 핵심 가치이다.
요셉은 시므온을 이끌어내어 형제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완전체 구성), 이후 직접 집으로 돌아와 형들에게 제일 먼저 "너희 아버지,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 생존해 계시냐"고 물었다. 설교자는 이를 의도된 행위로 해석하였다.
언급하는 것은 그 대상을 그 자리에 초대하는 것이다. 요셉은 언약의 하나님을 먼저 초대하고, 이어서 믿음의 가부장인 아버지 야곱을 소환함으로써 요셉의 집을 애굽이 아닌, 아버지의 집의 질서가 살아있는 공간으로 완성하였다.
요셉은 형제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5배나 많은 음식을 주었다. 설교자는 이 장면에서 요셉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의 가치 질서를 읽어냈다.
절대 강국 애굽의 질서는 크고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요셉은 총리의 권세를 가지고도 가장 작은 자, 어린 자, 약한 자인 베냐민에게 집중하였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의 가치—미움받고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약함 속에 하나님 백성의 가치가 있다는 것—를 구현한 것이다.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설교를 마무리하였다.
"지금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세상을 위로한다. 주님은 소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소망이 생겨난다."
'내가 큰 사람이 되면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세상의 오류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약함과 낮음을 짊어지는 삶이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능력임을 보여준다. 성도들은 복음의 은혜를 붙잡고, 작은 자를 돌아보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권면받았다.
2026년 4월 19일, 설교자는 로마서 2장 1-16절을 본문으로 "심판주"라는 제목의 주일 설교를 전했다. 설교는 현대인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심판'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누가 심판주이신지, 왜 인간은 심판의 자리를 탐내는지,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로마서 2장의 흐름을 따라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고발한 뒤, 2장에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유대인들을 향해 손가락을 돌린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아, 그대가 누구이든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종교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면서도 스스로 심판관 자리에 앉는 사람에게 바울은 직접적으로 경고한다. 심판·진노·정죄라는 단어는 감성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로마서 2장 16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그날"을 말한다. 바울은 심판의 집행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선포하며, 설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선언한다. 도예가가 자신의 도자기의 균열을 누구보다 잘 알듯, 건축가가 자신이 설계한 건물의 취약점을 꿰뚫듯,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16절의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창조주이신 예수님뿐이며, 그분의 심판이 진리에 맞다(2절)는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공정하게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은 주님 오시기 800년 전에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질병 때문에 상하였다"고 예언했고, 그 말씀은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역사상 판사가 피고의 죗값을 대신 치른 경우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그 일을 담당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차갑고 냉정한 법정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담긴 역설의 자리다. 스스로 죗값을 치르셨기에 그분의 용서는 진정한 용서이고, 그분의 정죄는 온전히 정당하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요한복음 1장 12절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예수님께 있으며,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주셨다"고 직접 말씀하신다. 심판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에게 위임하신 고유한 권한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다면 심판의 주님 되심 또한 받아들여야 하며, 그 두 권세는 하나로 묶여 있다.
인간이 심판의 자리에 앉으려는 경향은 단순한 교만이나 실수가 아니라, 창세기 3장과 직결된 가장 뿌리 깊은 죄성이다. 에덴에서 뱀은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유혹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한, 즉 심판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원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심판권을 인간이 차지하려 한 것이며, 그 죄성은 지금도 계속 작동한다.
인간 판사는 피고의 내면과 동기를 알 수 없고 증거로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세상 법정은 1심·2심·대법원을 거쳐도 억울한 자가 나오고 교묘히 빠져나가는 자가 생긴다. 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모든 은밀한 것이 드러나고 동기까지 심판받는다. 11절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처벌하지 않으신다. 분별(행동을 평가하는 것)과 심판(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야고보서 4장 12절은 "입법자와 재판장은 오직 한 분"임을 선언한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두려운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밝히 드러나는 자리다. 은밀한 것까지 아시는 그분 앞에서 숨기려 하지 않고 삶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곧 회개다. 4절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어주고 있음을 모르십니까?"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지금 심판을 유예하고 오래 참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돌이킬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향한 정죄나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심판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에덴의 유혹은 지금도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것과 내가 심판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구속주이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의미 있듯, 심판이 있기에 구원의 의미가 있다. 16절의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라는 표현은 심판의 소식이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다. 심판의 권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모두 예수님께 있다. 오늘 우리는 심판받을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지도록 초청받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은혜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 다음세대를 전담하여 섬길 사역자를 보내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에 넉넉한 예배 공간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제19권 22호
2026년 5월 31일